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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정치 개그 시리즈

⚙️ 《지구병크 연대기 – 리비아》🏜️ 2편 – 카다피의 ‘대중공화국’ (1969~2011)

by 지구굴림자 2025. 10. 27.

⚙️ 《지구병크 연대기 – 리비아》🏜️ 2편 – 카다피의 ‘대중공화국’ (1969~2011)

 

“석유는 총알로 바뀌었다.”


🔥 1969년, 혁명은 성공했다. 그러나 자유는 오지 않았다.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젊은 장교 무아마르 알 카다피
자신을 *“인민의 지도자”*라 부르며 새로운 리비아를 선포했다.
그는 **‘이슬람 사회주의’**와 **‘직접 민주주의’**를 내세워
“정당도, 의회도 필요 없는 진정한 인민의 나라”를 약속했다.

문제는, 그 인민이 발언권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정당 대신 ‘인민위원회’가 생겼지만, 그 위원회는 오직 카다피의 의지로 움직였다.
그는 말로는 국민을 찬양했지만, 실제로는 국민을 감시했다.


💣 석유의 축복은 독재의 무기였다.
1970년대, 리비아의 석유 수출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러나 그 부는 국민의 복지보다 무기와 정보기관으로 흘러갔다.
카다피는 “석유 수익은 모두 국민의 것”이라 외쳤지만,
실제로는 국민을 지배하기 위한 권력의 연료로 쓰였다.

그는 반대파를 감시하고,
조그만 의심만 있어도 공개 처형을 명령했다.
트리폴리의 공항에는 “인민의 적은 리비아의 적”이라는 구호가 내걸렸다.
그리고, 세계는 그를 **‘사막의 광인’**이라 불렀다.


🌍 세계와의 전면 충돌.
1980년대, 카다피는 미국과 유럽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는 팔레스타인 게릴라와 아프리카 무장단체를 지원했고,
결국 1986년 트리폴리 폭격이라는 대가를 치렀다.
리비아의 수도는 불길에 휩싸였고, 그의 딸이 공습으로 숨졌다.

이 사건 이후 그는 더욱 폐쇄적으로 변했다.
서방 세계는 리비아를 테러지원국으로 규정했고,
경제 제재로 인해 국민의 삶은 점점 피폐해졌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다피는 버텼다.
그는 “우린 고립됐다, 하지만 주권은 지켰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만의 신념서인 『그린북』을 내세워
“국민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대중공화국”이라 주장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린북이 헌법을 대신한 독재 매뉴얼이었다.

리비아는 부자였다. 그러나 국민은 가난했다.
석유의 향기가 진동했지만, 자유의 공기는 없었다.


🌪️ 2011년, ‘아랍의 봄’이 불어왔다.
チ니지아와 이집트의 봉기가 번지자,
리비아 시민들도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42년 동안 철권으로 군림한 그가
마침내 민중에 의해 끌려 내려졌다.

그날, 트리폴리의 모래바람 속에서
사람들은 이렇게 외쳤다.

“지도자는 무너졌지만, 나라의 상처는 여전히 남아 있다.”


😂 유머 엔딩
카다피가 말했지.

“나는 국민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대답했어.
“그건 총소리야, 각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