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한민국 3대 종교 시리즈 ① 불교 – “호국의 종교, 한국 불교의 여정” 🔹 4부: 일제강점기 – 변질과 저항
⛩️ 일제의 통제와 변질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제는 한국 사회의 모든 제도를 통제하려 했고, 불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조선총독부는 **사찰령(1911년)**을 제정해 전국 사찰을 총독부 산하에 두고 주지 임명권까지 장악했다. 이는 불교계를 사실상 국가 기관처럼 통제하기 위한 장치였다. 게다가 일본식 불교 제도를 강제로 이식하면서, 승려의 결혼 허용과 같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이는 한국 불교의 전통적 계율을 무너뜨리고 일본식 종단 구조에 편입시키려는 시도였다. 불교는 본래 수행과 청정 계율을 중시했지만, 일제의 개입으로 그 정신적 뿌리가 크게 흔들렸다.
📜 문화적 왜곡과 정체성 위기
사찰은 단순한 종교 공간이 아니라 한국인의 문화와 전통이 깃든 곳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사찰의 재산을 마음대로 통제했고, 사찰 건축 양식까지 일본식으로 변형시키려 했다. 불교가 민족 정신의 버팀목에서 식민지 통치의 도구로 전락할 위험이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불교계 내부에서도 갈등이 생겼다. 일부는 일제의 정책에 순응했지만, 또 다른 일부는 이를 거부하고 독립운동의 길을 선택했다.
🔥 호국 불교 DNA의 재발견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뿌리 깊은 호국 전통은 꺼지지 않았다. 만해 한용운은 대표적인 상징이다. 그는 문학 작품 《님의 침묵》을 통해 민족의 아픔과 저항 의지를 은유적으로 드러냈고, 불교계 지도자로서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만해는 “조선 불교는 민족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신념을 바탕으로 불교를 단순한 종교가 아닌 민족 해방의 도구로 재정의했다. 그의 사상은 불교가 더 이상 산속에 머무르는 종교가 아니라, 민족과 함께 투쟁하는 존재라는 것을 보여줬다.
✊ 승려들의 항일운동
역사 기록을 보면, 다수의 승려들이 독립운동에 은밀히 참여했다. 일부 사찰은 임시정부 자금을 지원했고, 청년 승려들은 항일 무장단체에 합류하기도 했다. 이는 고려시대 승병의 전통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시대적 방식만 바뀌어 살아남았음을 보여준다. 불교가 군사적 저항에서 물러나 있던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신적·물질적 저항의 후방 기지로 기능했다.
🌸 민족 불교의 유산
일제의 변질 정책은 불교에 깊은 상처를 남겼지만, 동시에 새로운 자각을 불러일으켰다. 억압 속에서 “민족과 함께하는 불교”라는 정체성이 다시 자리 잡았고, 이는 해방 이후 한국 불교가 다시 재도약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호국 불교의 정신은 일제 강점기에도 꺼지지 않은 불꽃처럼 이어졌고, 민족 저항의 불씨로 남아 있었다.
👉 결론적으로, 일제강점기의 불교는 고난 속에서도 변질되지 않고, 오히려 민족 저항과 결합하면서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억압은 컸지만, 그 안에서 다시 살아날 힘을 축적한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