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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제국 창건 연대기》

🦁 조선제국 창건 연대기 제2부 4편 – "길 위의 군사들, 세계를 보다"

by 지구굴림자 2025. 7. 28.

🦁 조선제국 창건 연대기 제2부 4편 – "길 위의 군사들, 세계를 보다"

 

1805년, 조선제국은 조용히 국경을 지키는 나라가 아니었다. 안준오 재상이 추진한 외교 전략은 조선을 세계사 속 군사 실험장의 일부로 변모시키고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유럽을 휩쓸고, 남미와 인도, 아프리카 식민지에서의 전투가 이어지는 와중에, 조선은 '중립국 군사 파견'이라는 절묘한 방식을 택했다. 그 본질은 명확했다 — 싸움에 직접 개입하진 않지만, 실전 경험을 쌓을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

📌 "우리 군인들은 조선에서 태어났지만, 세계에서 자란다"

이 시기 조선의 청년 장교단은 영국, 프랑스, 스페인, 심지어 오스만 제국의 전장에 '보조군'으로 참여했다. 대부분은 연락장교, 기술장교, 후방 조달 및 통신 임무를 맡았지만, 일부는 직접 전투에도 참가했다. 조선군의 훈련체계는 이들을 위해 새롭게 개편되었다. 유럽식 보병술, 기병 기동, 대포 운용술은 기본이고, 해전 전략과 화약무기 운용에 대한 첨단 정보가 실시간으로 반영되었다.

💡 "혼종 전력"의 탄생

그 결과 조선군 내부엔 놀라운 군사 문화가 형성된다. 일부 부대는 프랑스식 제복과 행군술을 따르고, 다른 부대는 영국식 규율을 기반으로 훈련받는다. 나폴레옹 휘하에서 활동한 전술 참모가 귀국해 군사학교의 교관이 되는가 하면, 오스만 제국 해군의 교리서를 번역해 조선 수군에 적용하는 사례도 있었다. 정조 시절의 무예도보통지에서 출발한 전통 군사학은, 이 시기를 거치며 '세계화된 군사학'으로 재탄생했다.

🌐 왜 싸우지도 않는데 군인을 보내는가?

이에 대한 논쟁은 국내에도 존재했다. 보수파들은 "조선 병사를 외국 땅에 보내 목숨을 잃게 하느냐"며 비난했고, 일부는 "서양 열강의 앞잡이가 되는 것"이라며 음모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안준오는 단호했다.

"싸우지 않고 강해지는 법은 없다. 경험 없는 병사는 숫자일 뿐이다."

이 발언은 이후 군사학교 교장실에 새겨졌고, '세계병참론'이라는 새로운 전략 교범이 만들어지게 된다.

⚔️ 귀환한 병사들, 바꿔놓은 전장 인식

해외에서 돌아온 병사들은 전투기술만이 아니라, 병참, 의무, 심리전, 대중선동전술 등 새로운 개념을 조선에 가져왔다. 이는 이후 조선이 펼칠 확장 전략의 초석이 되며, "세계 경험이 있는 장교단"이라는 전무후무한 인적 자산으로 쌓이게 된다.

안준오는 그들을 '돌아온 낙인 없는 전사들'이라 불렀다. 전장에서 피를 흘리고도, 이긴 것도, 진 것도 아닌 — 오직 경험만을 얻은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조선제국의 자산이라는 의미였다.

📜 마무리

1805년, 세계가 전쟁에 빠진 동안 조선은 그 전쟁을 지켜보며 배웠다. 강대국들의 패권 다툼 속에서도 조선은 기회를 만들었고, 군사력은 '혼종의 이름으로' 더욱 강해졌다.

이제 조선군은 단순히 국토를 지키는 병력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고 대응할 수 있는 실전형 전력으로 거듭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