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구병크 연대기 – 시리아: 혁명이 민중을 구하지 못한 나라》🌍 지구병크 연대기 – 시리아 (1) 철권의 유산 – 바트당과 아사드 가문
⚙️ 1963년, 시리아는 쿠데타로 새로운 시대를 맞는다.
군부 중심의 **바트당(Arab Socialist Ba’ath Party)**이 권력을 장악하며, “아랍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결합을 선언했다.
표면적으로는 혁명이었다. 식민 잔재를 청산하고, 부패한 왕정과 자본가 계층을 몰아내겠다는 이상이었다.
하지만 혁명은 곧, 또 다른 권력을 위한 도구로 바뀌었다.
🧱 1970년, 한 장교가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하페즈 알 아사드(Hafez al-Assad). 공군 출신으로, 바트당 내부의 권력투쟁을 정리하며 “교정운동(Corrective Movement)”이라 부른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는 민족주의보다 체제 안정을, 이념보다 통제와 질서를 선택했다.
그날 이후 시리아는 ‘아사드의 시리아’로 변했다.
🧩 아사드는 철저히 권력의 수학자였다.
정권의 뼈대를 군과 정보기관으로 묶고, 정부와 당의 경계를 없앴다.
모든 장교·관료 임명에 충성심 서약을 요구했고, 주요 보직은 자신과 같은 알라위파(Alawite) 종파 인물로 채웠다.
전체 인구의 10% 남짓한 소수파가 국가의 뼈대를 장악하면서, 수니파 다수는 점차 주변부로 밀려났다.
이때부터 시리아의 불균형은 구조가 되었다.
🔥 1982년, 그 불균형은 폭발한다.
수니파 중심의 무슬림형제단이 하마(Hama) 지역에서 봉기하자, 아사드는 전차와 공군을 동원해 도시를 포위했다.
도시는 불탔고, 약 2만 명이 사라졌다.
정부는 “테러리스트 진압”이라 발표했지만, 실상은 공포를 통한 통치의 완성이었다.
이날 이후 “하마를 기억하라”는 말은, 곧 “저항은 곧 죽음”이라는 암호가 되었다.
🏛️ 아사드는 통치를 예술처럼 다뤘다.
모든 학교 교실에는 그의 초상화가 걸렸고, TV 뉴스는 하루 종일 “지도자의 현명한 지도력”을 송출했다.
시리아 사회는 정보기관, 군, 교육, 종교까지 하나의 거대한 감시체제로 재편됐다.
그의 이름은 ‘국가의 아버지’가 되었고, 비판은 곧 신성모독이 되었다.
💀 그러나 철권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2000년, 하페즈 알 아사드가 사망하자 시리아는 또 한 번의 ‘혁명’을 맞았다.
하지만 이번엔 국민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아들, **바샤르 알 아사드(Bashar al-Assad)**가 국민투표 형식으로 권좌에 올랐다.
결과는 99% 찬성. 투표는 이미 끝나 있었다.
🔒 아버지가 만든 공포의 체제는 아들 손에서 디지털 감시국가로 진화했다.
정보기관은 인터넷 게시글까지 감시했고, 정치개혁을 외치는 목소리는 체포와 고문으로 사라졌다.
시리아는 겉으로는 ‘공화국’, 실질적으로는 세습 독재왕조가 되었다.
아사드 가문은 세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누적된 억압의 시간은, 2011년의 폭발을 예고하고 있었다.
🔥 병크 포인트:
“혁명으로 세운 권력이, 혁명을 금지했다.”
📎 다음 편 예고:
〈지구병크 연대기 – 시리아 (2) : 혁명의 불꽃, 내전의 늪〉
거리의 함성이 총성으로 바뀌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