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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정치 개그 시리즈

⚙️ 지구병크 연대기 ② 1948 – 건국의 기회를 독재로 만든 이승만

by 지구굴림자 2025. 10. 15.

⚙️ 지구병크 연대기 ② 1948 – 건국의 기회를 독재로 만든 이승만

 

“자유민주주의를 외쳤지만, 그가 세운 건 ‘자기 왕국’이었다.”


1️⃣ 해방의 아침, 그러나 진짜 해방은 오지 않았다

1945년 8월, 일본이 물러가자 한반도엔 자유가 찾아올 줄 알았다.
그러나 진짜 해방은 오지 않았다.
식민 권력은 떠났지만, 식민 체제는 남았다.

이승만은 바로 그 틈을 파고들었다.
미군정의 비호를 받으며, 자신을 “자유의 상징”으로 포장했다.
그러나 그의 자유는 ‘미국의 승인’ 아래 존재하는 자유였고,
그의 민주주의는 ‘자기 권력을 위한 제도’였다.

“이승만은 건국의 대통령이 아니라,
해방의 혼란을 이용해 권력을 독점한 첫 번째 정치 상인이다.”


2️⃣ 친일의 귀환, 독립운동가의 추락

이승만 정권의 가장 큰 병크는 친일파의 부활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이 세워놓은 임시정부의 정신은 무시됐고,
그 자리를 차지한 건 일제 경찰, 관리, 기업가 출신들이었다.

1948년 건국 후 내각의 절반 이상이 일제 협력자 출신이었다.
그들은 단 한 번의 단죄도 받지 않았고,
오히려 “반공 전선의 동지”라는 이름으로 특혜를 받았다.

그때부터 대한민국의 정의는 기울었다.
“친일청산”이란 단어는 입 밖에도 꺼내기 힘든 금기가 됐다.


3️⃣ 공포로 세운 자유 — 제주4·3과 보도연맹

1948년, 제주에서는 단 한 번의 집회가 전쟁이 되었다.
“단독정부 반대”를 외친 민중에게 돌아온 건 군경의 총부리였다.
그해 겨울까지 3만 명 이상이 희생됐고, 섬 전체가 ‘학살의 섬’이 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 보도연맹 학살이 시작됐다.
좌익으로 의심된 이들은 재판도 없이 끌려가 총살당했다.
6·25가 터지자 정부는 ‘내부의 적’을 명분으로 민간인 20만 명 이상을 학살했다.

“이승만의 자유는 언론의 자유가 아니라,
총구 아래에서 침묵을 강요하는 자유였다.”


4️⃣ 6·25 – 무능과 기만의 극장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쟁이 터졌을 때
이승만은 서울 시민에게 한마디 경고도 없이 먼저 도망쳤다.
한강 다리를 폭파한 것도, 피란 계획 없이 내린 즉흥 명령이었다.

서울에 남은 사람들은 북한군보다 정부의 무책임에 분노했다.
수많은 민간인이 피난길에 오르지 못한 채 버려졌다.

그런데도 그는 방송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서울 시민은 정부의 지시에 따르라.”
이미 자신은 대전으로 도망간 뒤였다.

그의 무능은 수십만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그럼에도 그는 전쟁을 정치 도구로 삼아,
‘비상계엄’과 ‘반공법’을 무기 삼아 영구 집권의 길을 열었다.


5️⃣ 권력의 사유화 – “나의 나라, 나의 헌법”

1952년, 이승만은 헌법을 바꾸었다.
직선제를 도입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사실상 **‘자기 재선용 헌법’**이었다.
이후로 선거는 부정, 언론은 통제, 국회는 장식품이 됐다.

그가 남긴 정치문화는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을 괴롭힌다.
권력을 사유화하고, 반대를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방식.
그건 이승만이 만든 “한국형 정치병”의 원조다.

“그는 대통령이 아니라,
자기 이름으로 나라를 경영한 CEO였다.”


6️⃣ 병크의 결말 – 건국의 기회 → 독재의 출발

항목내용
시대적 기회 식민 잔재 청산, 민주정부 수립
실제 결과 친일세력 복귀, 언론통제, 학살, 부정선거
병크 포인트 건국의 기회 → 독재의 출발

결국 이승만은 자유를 외쳤지만, 자유를 가장 많이 짓밟은 대통령이었다.
그의 시대는 4·19혁명으로 끝났지만,
그가 남긴 권력의 유전자는 박정희와 전두환,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7️⃣ 후일담 – 진실을 부정하는 사람들

제주 4·3 사건은 이제 **진영을 가리지 않고 ‘사실로 인정된 역사’**다.
보수 진영에서도 이미 공식 사과가 있었고,
정부 차원에서도 “국가 폭력의 잘못을 인정한 지 10년이 넘었다.”

그런데 요즘,
명명백백한 진실을 왜곡하는 영화를 보고 환호하는 정치인이 있다.
집권 야당의 당대표가 그 영화를 관람하고 지지 발언을 남겼다.

그 장면은 마치
과거의 공포정치를 정당화하려는 ‘유령의 재등장’ 같았다.
이미 밝혀진 진실조차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 태도는,
이승만이 남긴 **“거짓의 유산”**을 지금도 누군가가 이어받고 있다는 증거다.

“그들은 아직도, 명명백백하게 드러난 진실을
‘아니라고’ 외치며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8️⃣ 결론 – ‘건국의 아버지’ 신화의 붕괴

이승만은 교과서에서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실상은 건국의 가능성을 죽인 사람이었다.
그가 만들고 남긴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두려움의 시스템이었다.

그 두려움은 아직도 이 땅의 정치와 언론 속에 남아 있다.
과거의 독재가 사라진 게 아니라, 형태만 바뀌어 존재하는 셈이다.

“이승만이 세운 건 국가가 아니라, 공포였다.
그리고 그 공포는 아직도 누군가의 입을 통해 되살아난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제주4·3 특별법 백서, 미군정 보고서, 한국전쟁 구술자료, 위키백과
시리즈: 《지구병크 연대기 – 국운이 너무 없는 대한민국》 (2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