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한민국 3대 종교 시리즈 ③ 천주교 – “순교와 저항, 한국 천주교의 길”
🔹 1부: 조선 후기 – 전래와 박해
✝️ 서학으로 들어온 신앙, 지식인의 자발적 선택
18세기 말 조선 지식인들은 중국을 통해 유입된 서학(西學) 서적을 접하게 된다. 성리학만으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느끼던 일부 학자들은 천주교 교리에 깊이 매료되었고, 외국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부터 스스로 교리를 연구하며 신앙 공동체를 조직했다. 조선의 천주교는 **“지식인 주도 자생적 신앙”**이라는 점에서 다른 나라와 확연히 구별되었다.
⚔️ 유교 질서와 충돌, 갈등의 시작
천주교의 교리는 당시 사회 체제와 정면으로 맞섰다. 조상을 제사하지 않는 것은 충효의 근본을 부정하는 것으로 여겨졌고, 인간 평등을 강조하는 가르침은 엄격한 신분제와 가부장적 질서에 균열을 가져왔다. 조정 입장에서는 단순한 종교 문제가 아니라 체제 전복의 씨앗이었다. 결국 천주교는 “사학(邪學)”으로 낙인찍히며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 끝없는 박해, 신앙의 피로 세워진 교회
1801년 신유박해에서는 정약용의 형 정약종을 비롯해 수많은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후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김대건 신부 순교,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수천 명의 신자와 성직자들이 처형되었다. 특히 병인박해는 동아시아 전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천주교 박해로, 프랑스 선교사들과 수많은 조선 신자들이 함께 희생되었다.
🌱 박해 속에서 더 강해진 신앙 공동체
흥미로운 것은, 이런 혹독한 박해가 신앙을 꺾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순교는 **“신앙의 증거”**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후대 천주교인들에게 강력한 정신적 유산이 되었다. 평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은밀히 성경을 읽고, 공동체를 지켜 나간 덕분에 신앙은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이어졌다.
🔥 한국 천주교의 정체성, 저항의 DNA
조선 후기 천주교는 단순히 외래 종교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대의 부조리에 저항하며, 신분과 성별의 벽을 넘어서는 새로운 질서를 상상하게 만든 힘이었다. 따라서 한국 천주교의 출발은 곧 순교와 저항의 역사였으며, 이후 근현대사 속에서 교회가 민족운동과 민주화에 앞장서는 배경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