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구병크 연대기 – 태평양 전쟁(The Pacific War) 🇯🇵 제6편 – 본토가 보이다: 필리핀 탈환 → 이오지마·오키나와
1944년 말, 태평양 전쟁은 완전히 뒤집혔다. 일본이 확장하던 초반의 6개월은 이미 과거가 되었고, 전투의 흐름은 필리핀에서 결정적으로 꺾인다.
🔥 “I shall return” – 맥아더의 귀환
1942년, 일본군에 밀려 필리핀을 떠날 때
**“I shall return(나는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한 맥아더.
그 약속은 1944년 10월 레이테 상륙작전으로 현실이 된다.
- 필리핀은 전략 요충지이자 해상 공급선의 중심
- 이 지역을 잃으면 일본군의 연료·식량·탄약 루트가 사실상 마비
- 일본 해군은 남은 전력을 쥐어짜 최후의 도박을 벌이지만 오히려 전력의 70% 이상을 잃는 참사
필리핀 탈환은 단순한 영토 회복이 아니라
**“일본 본토가 이제 직접 타격권에 들어간다”**는 전쟁의 전환점이었다.
✈️ 카미카제 – 전쟁이 막장으로 치닫기 시작하다
필리핀 전역에서 일본군은 사상 최초의 조직적 자살공격, 즉 카미카제를 투입한다.
- 연료도, 숙련 조종사도, 전투기 생산력도 부족
- 결국 “기체 + 조종사 = 폭탄”이라는 비극적 전술로 이동
이것은 일본군의 정신력이 아니라
전쟁 지속 능력의 한계가 드러난 상징이었다.
🏝 이오지마 – 본토 폭격을 위한 ‘피의 섬’
이오지마는 일본 본토에서 1,20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작은 섬이었다.
그러나 그 위치 때문에 미국 B-29의 반격·유턴 지점으로서 전략적 가치가 어마어마했다.
일본군은 이 섬 전체를 거대한 지하 요새로 만들고
*“한 명당 10명 이상을 데려간다”*는 절망적 전술로 대응했다.
- 미 해병대 사상자 26,000명
- 일본군 21,000명 중 생존 200명 이하
- 그 유명한 우뚝 솟은 성조기 사진이 이때 촬영됨
이오지마는 “섬 한 개 확보에 이 정도 사상자…”라는 충격을 남기며
미국에게 본토 침공의 난이도를 경고했다.
💀 오키나와 – 태평양판 스탈린그라드
이오지마가 핏빛 경고였다면,
오키나와는 지옥 그 자체였다.
- 일본군 10만
- 민간인 10~15만
- 미군 사상자 49,000
- 카미카제 1,900 sorties
- 빗물처럼 쏟아진 포탄 2백만 발
민간인들은 자살을 강요받았고,
섬 전체는 군대와 민간의 구분이 사라진 전장이 된다.
오키나와는 미국 전략가들에게 명확한 결론을 남겼다.
“본토에 상륙하면… 민간인 포함 사상자 최소 200만 명.”
이 판단이 바로 두 달 후
히로시마·나가사키로 이어지는 ‘결정’을 만드는 기저가 된다.
🎯 핵심 메시지
“이오지마·오키나와는 단순한 전투가 아니었다.
전쟁이 어디까지 인간을 밀어붙일 수 있는지 보여준 최종 시그널이었다.”